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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름한 주머니 사정

허름한 주머니 사정 초암 나 상국 떨쳐낼 수 없는 그리움에 외롭고 그냥 술이 고픈 날 어디선가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땅거미 내려앉은 거리를 거닐며 폐부 깊숙이 밀려오는 찬 바람을 맞는다 상기된 발걸음을 떼어놓으며 태연한 척 애써보지만 내 걷는 발걸음이 괜스레 무겁다 주머니 깊숙이 찔러 넣은 손에 잡히는 것은 낡고 가벼운 지갑의 허름한 자존심 떨떠름하게 발걸음을 더디게 한다 술잔을 부딪치며 마음 한쪽을 가벼이 비워본다 한 잔 두 잔 들이킨 술이 마취제처럼 몸뿐만 아니라 가난한 마음까지도 진창 취하게 만든다

2023.12.29

동짓날 과 어머님

동짓날에 과 어머님 초암 나 상국 닭의 홰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전 이른 새벽에 물동이이고 언 땅 끄트머리 미끄럼 타지 않도록 발가락에 온 신경모아 길어 온 약수물 내려놓고 정안수 한 사발 떠놓고 언 두 손 모으셨던 어머니 애간장 끊어낼 듯 살 속으로 파고들어 뼈마디 까지도 얼 것 같은 한파에 붉은 동지팥죽 쑤어 여기저기 놓으며 아귀의 접근을 허락지 않겠다던 어머니 이 엄동설한에 더욱더 보고 싶습니다 정말 그립습니다

2023.12.23

짧은 해거름

짧은 해거름 초암 나 상국 산모퉁이 돌아온 뽀로통한 심술이 난 듯한 바람이 뭔 일이 있었냐는 듯 가던 길 멈춰 서서 시비를 건다 칼바람에 잔뜩 움츠린 채 점점 느려지는 발걸음이 길을 재촉하지만 가야 할 길이 먼 길임을 알기에 시비 거는 바람과 동행을 해도 좋겠다란 생각에 잠시 헛기침을 해본다 산 그림자도 내려앉고 속옷 깊은 곳까지 파고드는 한기에 길마저도 얼어붙는지 눈이 휑하다

2023.12.15

출구 없는 퇴로

출구 없는 퇴로 초암 나 상국 낮은 산등성이에서 제 딴 에는 호랑이 같은 기세 좋은 걸음으로 내려온 바람이 막다르고 어두운 골목길에 갇혀 소멸해 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가 싶게 여기저기서 아우성이지만 나 몰라라 하더니 바람 앞에 흔들리던 촛불도 생을 다한 듯 바닥으로 힘없이 길게 드러누워 출구도 찾지 못하고 이젠 퇴로마저 완전 막혀버렸다 진작에 버려야 할 것들을 손안에 꽈 움켜쥐고선 버리지 못함이 이젠 손을 펼 명분도 힘도 없음이리라

2023.09.18

그대가 잠든 밤

그대가 잠든 밤 초암 나 상국 통화가 끝난 지도 꽤 오랜 시간 밤하늘 별들은 무리 지어 빛나는데 왜일까 허전한 이 마음은 보고 싶다 말도 못 하고 외로움은 뼈가 녹아내리듯 사무치는데 잠자는 바람에게 전할 말을 전할 수도 없고 말을 한들 늘 외면만 당하는데 쉬 잠들지 못하고 이 밤 또 얼마나 괴로워 해야만 하는 건가 나 그대를 사랑하는 것만 같은데

2023.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