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껍질 바람의 껍질 초암 나 상국 하루의 해가 제집으로 돌아간지도 언제인지 모른다 막 놓쳐버린 전철의 뒤꽁무니도 이젠 보이지 않고 먼 먼 기다림에 가슴팍을 후려치는 바람 밤하늘에 별빛은 빛나지만 달은 어디로 숨었을까 그림자마저도 존재의 가치를 상실하고 털썩 주저앉은 의자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무심코 내던진 시선이 낡은 신발끝에 머물고 한기에 움츠리며 초점을 흐린 채 먼 갈길을 손으로 꼽아본다 시 2024.03.17
봄과 겨울의 대화 봄과 겨울의 대화 초암 나 상국 어제도 오늘도 영하 10도가 넘어 아직은 떠날 때가 아니라고 아랫목 찾아 드러누우려 하는데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대문을 확 밀치고 들어와 마당에 서서 어서 방 빼 달라고 큰소리치는 당돌한 놈 하지만 그래도 한 성깔 한다고 이 산 저 들 그리고 강에도 하얗게 팝콘처럼 퍼붓는 말 너 같으면 미련 없이 떠나겠냐 갈길도 먼데 그렇게 쉽게는 못 떠나 시 2024.03.04
동두천행 막차 동두천행 막차 초암 나 상국 추위는 동사라도 할 것 같은데 한 잔 술이 발걸음을 더디게 했다 취기는 없는것 같은데 마취에 취한 듯 몸은 갈지자로 따로 논다 서둘러 보지만 생각과는 달리 거드름을 피우다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동두천행 막차를 향한 초침소리는 멈추지도 늦추지도 않고 방향감각 까지도 비몽사몽 친구는 떠나고 한 잔 술에 농락당한 속만 바짝바짝 태운다 시 2024.02.26
빗소리 들으며 빗소리 들으며 초암 나 상국 귓속에 사랑을 속삭이듯 간지럽히던 바람도 어디론가 다 떠나고 어두운 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 들으며 지그시 눈을 감고 오케스트라의 협주곡에 몸 내맡긴다 물밀 듯 밀려오는 그리움에 숨죽여 두 손을 가만히 맞잡는다 앞도 뒤도 보이지 않는 긴 어둠의 터널 속에서 음률의 낮고 높은음이 긴장감을 증폭시키며 고조시키고 지난날 뜨거운 정사의 열정에서 어느 날 낯선 이별의 쓸쓸함과 외로움까지 빗소리는 나직하게 되뇌며 가만히 가만히 내려앉고 있다 시 2024.02.21
겨울 냉이꽃 겨울 냉이꽃 초암 나 상국 한 겨울 시베리아 벌판 같은 북풍한설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쓰러지지도 않은 채 굳건하고 꼿꼿하게 하얗게 피어난 꽃 그 모진 생명이 온갖 시름과 갖은 아픔에도 꼭 어머님을 닮아 있는 것만 같아 왠지 모르게 숙연하고 애잔한 꽃 잘 보라는 듯 하얀 치아 드러내며 함박웃음을 짓는다 시 2024.02.18
어머니의 부뚜막 어머니의 부뚜막 초암 나상국 부뚜막을 뜨겁게 달구던 아궁이의 시커멓게 그을린 그을음은 어머니가 속으로만 삭였을 속 타는 마음이었으리라 온갖 시집살이로 숨소리조차도 제대로 낼 수 없었던 어머니의 궁핍했던 삶이 뜨겁게 달구어졌다가 차갑게 식기를 반복하며 그 눈물 나는 생체기들은 외면받기 일쑤였고 늘 뒷전이었다 솥뚜껑이 들썩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릴 때마다 어머니는 모든 걸 잊고 그 구수한 냄새에 가족들의 배부른 행복을 염원하셨으리라 시 2024.02.16
시류도감 시류도감 초암 나 상국 세월이 어느 세월인데 격자무늬에 덧대어 붙이는 건지 세월이 거꾸로 돈다고 한들 천심에 역행은 하지 않을지어다 바람이 지나간 자리 껍데기 속을 갉아먹던 굼벵이가 뭐라고 읽을까 저 혼자 살겠다고 방탄철모 속에서 나팔수들을 내세워 꼬리 늘리기를 세월만 가라고 해보지만 세월 앞에 장사 없고 진실은 속인다고 속여지지 않는다는 걸 바람의 파문이 거듭될수록 파장을 크게 일으킬 때 신작소설이라던 허구 맹랑한 지껄임도 낱낱이 바닥에 널브러지리라 시 2024.02.09
아물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 아물지 않는 상처의 흔적들 초암 나상국 마지막 나뭇잎 편지를 전해주던 바람도 소멸한 지금 눈 쌓이는 언덕길을 오르며 그 너머로 멀어져 갔던 지난날 길 잃은 날들의 기억 저편 어디쯤 종종거렸던 수도 헤아릴 수 없는 발자국들 잊혀진 듯 잊혀지지 않은 미련의 굴레 속에서 낯설어하던 실어증과 동행하던 우울증 그 끝은 어디까지일까 시 2024.02.06
구안와사 구안와사 초암 나 상국 도대체 이게 뭔 일인고? 늘 남의 얼굴만 보고 생각지도 못했는데 하루아침에 청상과부가 된 듯 멍하니 세상이 반쪽이나 마비일세 눈은 사팔뜨기이고 입꼬리는 저울추를 잃었네 별일이 아닌 게 아니고 별일일세 그려 참.... 시 2024.01.28
눈 내린 새벽안개 눈 내린 새벽안개 초암 나 상국 그네를 타는 바람 따라서 이리저리 떠도는 하얀 나비처럼 휘날리던 하얀 눈이 밤새 자박자박 수북이 쌓이어만 갔다 잠결에 깨어나 얼떨결에 현관문을 힘겹게 밀치니 얼얼하게 코끝을 아리도록 스치는 한기 몸을 움츠리며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비비며 졸음을 쫓아낸 눈으로 바라본 세상 하얀 눈세상이 아닌 온통 하얀 안개바다였다 시 2024.01.10